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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빌론' 포스터

 

 

 

1. 영화 <바빌론> 간단 정보

 영화 <바빌론>은 또다른 영화 <위플래시>,<라라랜드>,<퍼스트맨>으로 3연타 홈런을 친 데이미언 셔젤이 1920년대 후반 할리우드를 품고 연출한 영화입니다. '브래드 피트' , '마고 로비' , '토비 맥과이어' 등 캐스팅도 화려하기 이를데가 없어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합니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영화사적 과도기를 배경으로 그려낸 리드미컬한 서사는 큰 호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2. 1900년대 후반 할리우드의 특징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제작한 최초의 영화인 <열차의 도착> 이후 30여년간 모든 영화는 무성 영화 였습니다. 말 그대로 소리가 없는 영화인데, 그림들이 조용히 움직이기만 한다는 뜻을 담아 'Voving Pictures' 라고 불렸고 시간이 지나면서 'Movie' 라는 말로 변했습니다. 

 그러던 1927년, 워너브라더스에서 최초의 유성 영화인 <재즈 싱어>를 내놓게 됩니다. 워너브라더스에서 영화에 소리를 입히기 위해 고안한 비타폰 시스템을 처음으로 적용한 이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대박을 치며 유성 영화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배우들의 목소리와 대화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유성 영화를 'Talking Pictures' 이른바 토키 영화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영화 산업은 급속도로 체계화되기 시작합니다. 배우들은 완벽한 대사 암기와 정확한 발음을 요구 받았고 사운드 편집 기술도 발전하면서 관객의 시청각 모두를 사로잡는 엔터테인먼트로 발전했습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며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할리우드는 유성 영화 시스템을 전 세계 영화 산업에 전파합니다. 하지만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대사에 신경이 쏠리면 몸짓으로 메시지를 구현하는 무성 영화의 미학적 가치가 훼손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29살의 알프레드 히치콕이 연출한 1929년작 <블랙 메일>이 영국을 비롯해 유럽 등지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도 유성 영화 방식을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유성 영화는 복합 예술의 단계로 끌어 올렸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대사와 음향, 음악등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내밀한 심리 서술이 가능해졌고 단순 이미지에서 내러티브 즉 서사에 중점을 두는 연출 방식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사실주의에 입각한 영화들이 제작되기 시작했고 이는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며 영화를 대중문화의 단계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가 다양해진 만큼 할리우드 영화사들의 사업 운영 방식도 변하게 됩니다. 음반사, 배급사, 은행 등과 협력관계를 맺고 거대한 제작 인프라를 구축한 뒤 스튜디오를 활용해 제작 효율성을 높였습니다. 이처럼 개선된 환경 덕분에 할리우드는 명실상부 최고의 영화산업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30년대 미국 전역을 휩쓴 경제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 영화는 사람들의 일상에 점점 녹아들었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입장료 5센트만 내면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소형 영화간이 유행이었는데 5센트 동전을 만드는 재료인 니켈과, 악기의 종류 중 하나인 멜로디언을 합쳐 니켈로디언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산업혁명 시절 영국에서 각종 가십과 카툰을 연재했던 잡지 형태인 페니 드레드풀이 대중에게 보편화되면서 출판업의 성장을 촉진 시켰듯, 니켈로디언은 영화에 대한 대중의 진입장벽을 낮추면서 영화 산업 성장에 큰 이바지를 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우드 황금기에도 어두운 이면이 존재했습니다. 독점을 통해 비대해진 영화사의 힘은 곧 영화인들에게 거대한 제약으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영화사들은 영화관에 A급 영화를 배급할 때 자사의 B급 영화들도 묶음으로 구매하도록 강요하는 블록 부킹을 거듭하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자연스레 모든 영화를 구매할 여력이 없는 독립 영화관들은 경쟁에 밀려 무너지게 되고, 영화사들은 이 영화관들을 모조리 인수해 더욱 몸집을 키우게 됩니다.

 또한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전속 계약 의무도 지우게 되면서 인력 독점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결국 30년대 할리우드는 제작사를 중심으로 모든 영화와 스타들이 제조되는 하나의 거대한 공장처럼 움직인 셈입니다. 그렇게 영화가 문화 주류로 떠오르면서 20세기를 대표하는 영화배우들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배우들을 동경하며 새로운 스타가 되기 위해 영화계에 뛰어드는 젋은이들도 늘어났습니다.

 영화 <바빌론>은 바로 이 시기 그들의 도전기를 다루며 할리우드 산업의 명암을 조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호불호가 나뉘는 영화 <바빌론>

 영화 <바빌론>의 가장 큰 단점이라고 하면 아마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 <바빌론>은 영화의 역사,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는 동시녹음의 도입 전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영화가 바로 <사랑은 비를타고>입니다. 사실 영화의 내용 상당부분이 <사랑은 비를타고>와 비슷합니다. 영화 <바빌론>에는 <사랑을 비를타고>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많아서, 바빌론을 감상하기 전 사랑을 비를타고를 관람 하고 보면 더욱 영화내용을 이해하기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랑은 비를타고> 내에 포함되어있는 1920년대의 할리우드 역사 유성영화가 등장함으로써 영화계는 어떻게 변화하였는가 이런부분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영화 <바빌론>을 감상하기에 큰 무리가 없을듯 합니다.

 물론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바빌론>을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겠지만 영화 자체에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 요소가 많고 어느 정도의 사전 지식이 있어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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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lsquo;포레스트 검프&rsquo; 포스터

 

 

1. 영화 <포레스트 검프> 간단 정보

  선천적으로 불편한 다리와 남들보다 조금 떨어지는 지능을 가지고 있는 소년 ‘포레스트 검프’는 어머니의 헌신적이고 강인한 보살핌과 사랑으로, 사회의 편견과 괴롭힘 속에서도 따뜻하고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고 성장합니다. 어느덧 성장한 포레스트 검프는 친구들의 괴롭힘을 피해 도망치다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어느날 우연히 들어간 대학교 미식축구장에서 그의 재능을 보게 된 대학측은 그를 미식축구 선수로 발탁되고, 졸업 후에도 뛰어난 신체능력으로 군에 들어가 성과를 거두며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행복할것만 같던 시간도 잠시, 어머니가 병에 걸려 돌아가고 첫사랑이었던 제니 역시 그의 곁을 떠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행복의 의미를 찾는 포레스트가 우리에게 전하는 인생의 이야기, 영화 <포레스트 검프>입니다.
 많은 이들의 인생영화로 꼽히는 전설의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놀랍게도 제작 당시에는 작품을 반기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IQ 낮은 남자의 이야기가 많은 관객을 모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연배우 ‘톰 행크스’는 자신의 출연료를 부족한 제작 예산에 투입하기로 결정 하였고 결국 작품은 톰 행크스의 불멸의 대표작이 되었습니다. 작품은 개봉된 후 높은 사랑과 인기를 받으며 수많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2.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캐스팅 비하인드 스토리

 <포레스트 검프>는 ’웬디 파이너먼‘의 소설을 원작으로 두고 제작되었습니다. 웬디 파이너먼은 소설을 각색할 각본가를 신중하게 골랐고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각본가는 ’에릭 로스‘ 였습니다. 에릭 로스의 각본이 완성된 후, 각본은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에게 전해졌습니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은 DVD코멘터리를 통해 처음 각본을 봤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며 당시 순간을 상세히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그전부터 여러 각본을 보았지만 에릭로스의 각본은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마음 졸이며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사실 IQ 낮은 남자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나 충동 같은건 없었습니다. 이 기이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끝에 어떻게 될까, 다음은 어떻게 될까 계속 궁금했습니다. 각본을 받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건 아주 초창기였긴 했지만 좋은 징조였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감독은 <포레스트 검프>를 연기할 배우로 다른 배우는 생각할 수도 없이 ‘톰 행크스’를 바로 떠올렸다고 합니다. 다행히 톰 행크스는 각본이 마음에 쏙 들었고 그래서인지 놀랍게도 읽은지 약 한시간 반만에 계약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다만, 단 한가지의 조건을 걸었다고 하는데 바로 영화가 역사적으로 정확할 경우에만 역할을 맡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제작사인 ’파라마운트 픽쳐스‘는 톰 행크스에게 전체 제작 예산 5000만 달러 중 700만 달러의 출연료를 제안했습니다. 톰 행크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관계자들은 IQ 낮은 남자의 이야기가 많은 관객을 모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예산을 줄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예산을 줄이면 원했던 퀄리티의 영화를 만들기는 어려울 터, 톰 행크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안을 제작사에 건냈습니다. 바로 자신의 출연료를 제작 예산에 투입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신 출연료는 작품 흥행에 따라 성과급으로 받겠다고 덧붙였습니다. 제작사로서는 마다할 필요가 없는 제안이었고, 그렇게 톰 행크스는 거의 무급으로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제작사의 예상과 달리 다행히 작품은 그야말로 대박이 났고 톰 행크스는 작품을 통해 당시 출연료로 제안됐던 가격의 거의 10배에 달하는 6500만 달러(약 870억원)를 벌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톰 행크스는 <포레스트 검프> 연기로 제 6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고,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과의 인연을 이어가 이후 또 다른 명작으로 불리는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도 출연했습니다.
 제작자 ’스티브 스타키‘는 제니 캐릭터에 대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감정적으로 망가진, 상처가 깊은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상처받은 내면이 드러나는 인물이 제니를 연기해주길 바랬습니다.그는 ’로빈 라이트‘를 발견했고 로빈에게서 제니와 같은 상처받은 내면을 보았다고 합니다. 제자진들은 곧바로 로빈에게 대본 리딩을 요구했고 감독과 함께 스크린테스트를 거쳤습니다. 이후 다함께 제니 캐스팅 회의를 가졌는데, 그때 감독이 아주 심플하게 ’로빈을 뽑아야 해‘ 라고 말했고 제니 역 캐스팅은 그렇게 쉽게 결정됐습니다.
 제작자들에 의하면, 포레스트의 소년 시절을 연기한 배우는 아주 우연히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작진들은 먼저 테네시 멤피스 지역에 아역 배우 공개 오디션 공고를 냈습니다. 그리고 오디션 현장에서 엄마와 함께 찾아온 한 아이를 발견했고, 그 아이가 바로 ’마이크 험프리즈‘ 였습니다. 캐스팅 담당인 ’엘렌 루이스‘가 먼저 테이프로 아이를 녹화했고 제작자들은 녹화된 영상 속 아이를 보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들이 마이클 험프리즈를 보자마자 마음에 쏙 들어 한 이유는 다름아닌 ’어디서도 보지 못한 특이한 캐릭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카메라 앞에만 서면 얼어붙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카메라를 신경도 쓰지 않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의 말투와 목소리에 가장 크게 끌렸다고 고백했는데, 작품 속 어린 포레스트의 말투는 꾸민 것이 아닌 실제 마이클 험프리즈의 말투입니다. 톰 행크스는 마이클 험프리즈의 발음에 큰 인상을 받았고 마이클 험프리즈의 목소리를 참고해 어른 포레스트 검프의 목소리를 만들었습니다.
 제니 아역을 연기한 ’한나 홀‘은 콜로라도 출신입니다. 마이클 험프리즈와 마찬가지로 <포레스트 검프>가 한나 홀이 맡은 첫 작품입니다. 제작자들은 로빈을 캐스팅할 때와 마찬가지로 제니 아역을 연기할 배우로도 망가진 듯한 내면이 느껴지는 인물을 찾았는데, 한나 홀을 봤을 때 로빈과 같은 아름답지만 독특하면서도 망가진 듯한 내면을 느꼈고 그렇게 그녀를 캐스팅 했다고 합니다.
 영화 <식스센스>,<A.I>로 유명한 배우 ‘할리 조엘 오스먼트’의 첫 영화출연작은 바로 <포레스트 검프>입니다. 제작자 스티브 스타키가 직접 캐스팅 했다고 합니다. 감독은 할리 조엘 오스먼트가 이후 대배우가 된 것에 대단히 큰 기쁨을 표현하며 속편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다만, 감독은 몇년 뒤 실제로 속편관련 이야기가 나왔을 때 속편 제작에 반대했습니다.
 포레스트 검프의 지혜로운 어머니를 연기해 줄 배우로 감독은 ‘샐리 필드’를 줄곧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엔 젊다가 나이 드는 연기를 능숙하게 소화할 수 있는 배우, 무엇보다 성인 포레스트인 톰 행크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영화를 이끌 강력한 힘이 있는 배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놀랍게도 웬디 파이너먼도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감독이 샐리 필드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감독에게 먼저 샐리를 어머니 역할로 추천했다고도 합니다. 감독은 그 제안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곧바로 샐리 필드에게 대본을 보냈습니다. 다만 감독은 ‘어쩌면 샐리가 수락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크게 걱정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샐리 필드가 맡을 역할이 10살 차이에 불과한 톰 행크스의 어머니 역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샐리 필드와 톰 행크스는 영화 <펀치라인>을 통해 연인 사이를 연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걱정은 기우였고, 대본을 읽어본 샐리 필드는 그 즉시 출연을 약속했습니다.
 포레스트 검프의 영혼의 친구인 버바와 댄 중위 배우는 동시에 캐스팅 됐습니다. 감독은 오디션 당시를 회상하며 ‘둘을 보자마자 역할을 맡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고백했습니다. 참고로 버바의 크고 두꺼운 아랫입술은 버바를 연기한 ‘마이클티 윌리암슨’의 아이디어 였습니다. 감독은 제품을 고르고 고른 끝에 영화없계에서 종조 이용되는 ‘플럼퍼’를 그의 입술에 넣어 캐릭터를 완성했습니다. 캐스팅이 순조로웠던 마이클티 윌리암슨과 달리 댄 중위 캐스팅은 제법 난이도가 높았다고 합니다. 댄 중위가 초반에는 냉철하고 혹독하다 후반으로 갈수록 연민과 호감이 느껴지는 대단히 입체적인 캐릭터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작자는 그러한 댄 중위 특유의 엄청난 변화를 겪는 인물을 묘사할 수 있는 배우를 찾다 ‘게리 시나이즈’를 발견했고 그에게서 댄 중위의 모든것을 담을 수 있는 면면을 발견했습니다. 참고로 그 당시 게리 시나이즈를 모르던 관객들은, 영화가 정말로 다리가 없는 사람을 캐스팅 한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3. 중요한 소재였던 ‘깃털’의 의미

 작품의 초반, 깃털은 하늘을 날다 우연히 포레스트의 신발에 안착하고 작품의 마지막에 아들의 책에서 떨어진 깃털은 포레스트의 발에 떨어졌다 다시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감독에 의하면 깃털은 각본에서도 중요한 소재로 이용됐다고 합니다. 처음 각본에는 마지막 장면에 깃털이 없었다고 하는데, 감독의 의도로 각본을 수정해 넣었습니다. 감독은 깃털을 ’인생의 무작위성 혹은 운명‘을 나타내는 존재라고 표현했습니다. 깃털은 어디든 떨어질 수 있었으나 결국은 포레스트의 발 위로 떨어졌습니다. 감독은 ’깃털이 포레스트의 발 위로 떨어진 것도 운명‘ 이었다고 말하며 ’포레스트를 비유하는 존재’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감독에게 있어 포레스트는 바람을 타고 떠다니는 캐릭터로 인지됐기에 깃털이야말로 포레스트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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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 포스터



1. <캐치 미 이프 유 캔> 간단 정보

  당시 최고의 항공사 팬암의 부기장, 하버드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의사, 그리고 버클리 법대를 졸업한 변호사까지 전부 10대의 어린 나이에 사회적으로 권위가 있는 직업들을 사칭하면서 최연소 사기꾼으로 알려진 실존 인물 ‘프랭크 애버그네일 주니어‘. 그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 입니다. 스티븐 스틸버그 감독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톰 행크스, 크리스토퍼 워컨, 에이미 애덤스 등 초호화 캐스팅으로 작품서과 흥행성을 전부 잡은 영화입니다.

2.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 비하인드 스토리

 <캐치 미 이프 유 캔>은 5200만 달러의 제작비로 3억 5,200만 달러(한화로 대략 4,4040억원)를 벌어들이면서 제작비의 6배에 달하는 대박을 터뜨렸지만 2002년에 개봉한 영화들이 어벤저스 급이라 글로벌 흥행 순위는 11위를 기록했습니다. 평가는 로튼토마토 96퍼센트, 메타크리틱 75점, IMDB8.1로 연기력/연출/스토리 등 뭐하나 빠짐없이 전체적으로 호평이 많았습니다.
 <캐치 미 이프 유 캔> 영화는 실존 인물 ‘프랭크 애버그네일 주니어’의 동명 회고록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입니다. 물론 영화의 재미를 위해 각색되거나 과장된  부분도 있지만 프랭크에 따르면 대략 80퍼센트 정도가 사실이었다고 직접 인정했습니다. 당시에 유행하던 티비 프로그램 ‘투 텔 더 트루스’에 프랭크가 등장하며 영화가 시작되는데, 실제로 프랭크는 1977년 ‘투 텔 더 트루스’에 출연한 바가 있고, 출연자들의 대사까지 그대로 가져와 연출되었습니다. 영화상에서 결과는 보여주지 않았지만 당시에 실제로 프랭크가 누구인지를 맞춘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극 중에서 프랭크는 가출한 뒤로 아빠를 계속 만나며 이혼한 부모를 다시 재결합 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한때 아빠의 친한 친구였던 잭과 재혼한 엄마를 보며 모든것을 포기합니다. 하지만 이 스토리는 프랭크 애버그네일의 과거보다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과거에 더 가깝습니다. 스필버그 감독은 영화 속의 프랭크처럼 어린 나이에 부모가 이혼을 하고 엄마가 떠난 이유가 아빠의 친한 친구와 바람이 났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반면 프랭크는 영화와는 다르게 가출한 뒤로 부모를 만나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고 프랭크의 엄마도 재혼한 적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스필버그 감독은 <캐치 미 이프 유 캔> 뿐만이 아니라 <E.T.> , <미지와의 조우> , <인디아나 존스> , <링컨> 등 여러 작품에서 아빠와 아들의 관계에 집중합니다.
 극 중에서 프랭크가 사용한 가명 ‘배리 앨런’은 DC의 슈퍼히어로 플래시의 본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미성년자로 추정하는데, 배리 앨런 외에도 프랭크가 사용한 가명들 중 재밌는 디테일이 담겨있습니다. 팬암 기장을 사칭한 프랭크는 ‘하늘의 제임스 본드’ 라는 별명을 얻게 되고, 이 별명이 마음에 든 프랭크는 영화 <007>에서 나온 정장을 맞춥니다. 이때 사용하던 이름은 ‘미스터 플레밍’인데 007 시리즈 원작자인 ‘이언 플레밍’을 참조한 가명입니다. 그리고 의사를 사칭할 때 이용하던 가명은 ‘프랭크 코너스‘인데 닥터 코너스는 영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메인 빌런인 리저드의 본명입니다.
 모든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가 그렇듯이 영화의 재미를 위해 각색되거나 과장된 부분도 물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 속 프랭크는 외아들로 설정되어 있지만 4남매 중 셋째 아들이었고, 프랭크는 가출한 뒤 아빠와 다시 만나는 장면들이 있지만 실제로는 가출한 뒤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영화속에서 프랭크를 집요하게 쫓던 ’칼 핸레티‘는 가상이 인물이고, 실제로 프랭크를 쫓던 수많은 FBI 요원 중 한명인 ’조세프 시어‘를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라고 합니다. 브랜다 또한 간호사가 아닌, 당시에 프랭크가 사귀던 승무원을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이고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3. ‘사기꾼의 회고록’ 믿을 만 한 이야기일까?


 영화와 현실의 차이를 비교할 때 대부분의 자료는 프랭크 애버그네일의 회고록, 프랭크의 인터뷰, 그리고 인터뷰와 회고록을 기반으로 보도된 프랭크의 기사들입니다. 즉 이 모든 자료들은 전부 프랭크 애버그네일의 입에서 나온 말들뿐입니다.
 회고록에 따르면 프랭크는 5년동안 FBI를 피해 다녔고 1971년 프랑스에서 단 한 번 체포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프랭크는 5년간 캘리포니아, 조지아, 루이지애나, 매사추세츠, 뉴욕, 텍사스, 그리고 프랑스까지 총 7번 체포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회고록에 따르면 프랭크의 대형 사기 사건들은 전부 17살 때부터 20살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하지만 프랭크는 17살부터 20살까지 3년간 ‘콤스톡’ 뉴욕에 위치한 교도소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즉 기록에 따르면 5년동안 프랭크는 FBI를 피해 다닌 것이 아니라 대부분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고 밖에서 사기를 치고 다닌건 길어봐야 3개월 정도뿐입니다.
 1971년 프랭크는 보안이 철저하기로 유명한 애틀랜타 연방 교도소에서 유일하게 탈옥한 사람이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프랭크는 연방 교도소에 수감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고, 당시에 애틀랜타 조지아에 위치한 작은 지역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탈옥시도를 한 것은 맞지만 바로 잡혔다고 합니다.
 결국 체포된 프랭크는 위조기술 실력을 인정받고 FBI에서 40년을 넘게 일을 했다고 주장하며 100주년 기념으로 출판한 FBI 역사책에서도 본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인터뷰를 통해 밝히기도 했지만 책에서 프랭크의 이름은 그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않았고, 지난 40년간 FBI 측에서 프랭크에 대해 언급한 적 또한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프랭크의 친구로 알려진 FBI 요원 중 ‘조세프 시어’와 ‘로버트 러스 프랭크’가 있었는데, 로버트는 1978년 데일리 인터뷰 중 “빌어먹을 애버그네일이 내 이름을 들먹이고 다니지만 그를 만나본 적은 단 한번도 없다”고 밝혔습니다.
 프랭크는 가석방되고 난 뒤 텍사스에 위차한 작은 동네에서 편의점, 고아원, 주유소, 그리고 어린이 캠프 등 여러 곳에서 일한 기록들이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FBI에서 일을 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프랭크는 루이지애나에서 변호사 시험을 합격한 건 사기가 아니었다고 밝히면서 실제로 합격한 뒤 루이지애나 주검찰청에서 일을 하며 총 33건의 소송을 해결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루이지애나에서 일했다는 기록이 아예 없는것 뿐만이 아니라 변호사 시험을 봤다는 기록조차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프랭크가 팬암 항공사에서 위조한 수표는 250만 달러였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팬암 측에서 밝혀진 바로는 프랭크가 위조한 수표는 단 10장이며 액수는 1,500달러 미만이었다고 합니다. FBI 공식 사이트에서도 보면 정확한 액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희대의 사기꾼이라고 불리는 프랭크가 ‘스몰 포테이토’ 번역하면 사소한 사건에 해당되어 있습니다.
 프랭크에 대한 여러 증언들과 기록들이 하나둘씩 밝혀지면서 1978년부터 프랭크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노력을 해왔지만 각종 티비쇼와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회고록,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까지 제작되면서 전부 묻혀버렸습니다. 2021년 프랭크 애버그네일의 과거를 폭로한 책이 또 한번 출간되면서 아직까지도 프랭크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한 노력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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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아니스트' 포스터



1. 영화 <피아니스트> 줄거리(결말포함)

 1939년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때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의 해입니다. 주인공 슈필만은 폴란드에서도 꽤 유명한 유대계 피아니스트 입니다. 라디오 녹음 중 갑자기 시작된 독일군의 폭격으로 대피하던 중 자신의 친구인 유렉의 동생, 도르타를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됩니다. 피난을 위해 짐을 싸던 가족들은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과 싸울 것이라는 라디오 소식을 듣고 환호합니다.
 기쁨도 잠시, 독일은 폴란드를 빠른시간 안에 점령해버립니다. 독일은 폴란드 점령 후 유대인에게 점진적인 차별 정책을 시행합니다. 가구당   최소 2,000즐로티만 소유할 수 있는 정책, 식당과 공원 등 일부 사회 시설을 이용할 수 없는 정책, 유대인임을 구별할 수 있게 오른쪽 소매에 별모양 완장을 차는 정책 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책들을 넘어 1940년 10월 31일, 바르샤바의 유대인 격리 거주 지역인 ‘게토’로 강제 이주 시키게 됩니다. 이곳의 삶은 끔찍했습니다. 병과 기근으로 사람들은 죽어갔으며 독일군의 핍박으로 인권은 바닥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 이츠하크가 찾아옵니다. 그는 독일의 꼭두각시인 ‘유대인 경찰’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동생은 동포를 팔 수 없다는 이유로, 슈필만은 직장이 있다는 이유로 이 제안을 거절합니다. 이츠하크와는 반대로 게토 안에서 저항운동을 위해 일하던 돌렉과 마요렉을 만난 슈필만은 그들을 돕고 싶어했지만, 그들은 슈필만이 너무 유명하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합니다. 시간이 갈 수록 게토 안에서 유대인의 삶은 피폐해져 갑니다. 저녁시간 갑자기 들이닥친 독일군은 유대인을 이유없이 죽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게토 안에서의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 그들에게 1942년 3월 15일 다시 한번 강제 이주가 시작됩니다. 임시 숙소에 머물고 있는 그들 중 젊은 인원들을 선발하여 노동자로 축출해갑니다. 또다시 이동하는 그들은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른채, 독일군의 명령으로 기차를 타려고 합니다. 이 기차는 유대인 학살을 위해 독가스실이 있는곳으로 보내지는 기차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채 슈필만과 가족들은 기차로 향합니다. 슈필만의 친구인 이츠하크는 행렬에서 슈필만을 발견하고 그를 행렬에서 이탈시킵니다. 이츠하크는 기차의 목적지를 알고 있었고 슈핆만을 구하려 했던것이었습니다. 가족들을 포함해 유대인들을 실고 기차는 어딘가로 떠납니다.
 혼자 남겨진 슈필만은 다시 게토로 돌아와 노역생활을 이어갔고, 그 안에서 마요렉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게토안에서 채찍질은 기본이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삶에 슈필만은 지쳐갔고, 결국 마요렉에게 게토에서 빠져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마요렉의 도움으로 슈필만은 게토 밖으로 빠져나오는데 성공합니다. 게토를 빠져나간 슈필만은 옛 친구 안제이를 만나게 됩니다. 안제이는 슈필만을 도와줄 지인 마렉을 소개해주었고, 마렉은 슈필만에게 머무를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 줍니다. 그의 거처는 얼마전까지 자신이 있었던 게토 인근에 구해졌고, 그것을 보고 만감이 교차합니다. 마렉은 비상시에만 갈 수 있도록 주소가 적혀있는 쪽지를 건내주며 떠납니다.
 1943년 4월 19일, 게토 안에서 마요렉이 준비중이었던 무장봉기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채 한달도 안되어 무장봉기는 진압되고, 봉기를 일으킨 자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창문으로 지켜보던 슈필만은 깊은 절망감에 빠집니다. 그렇게 또 시간은 흐르고 마렉은 슈필만을 찾아와 이곳에서 대피할 것을 전해줍니다. 무장투쟁 준비중인 마렉의 집에서 무기가 발견되었고, 이로인해 안제이는 독일군에 붙잡히고 마렉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이상 갈 곳이 없던 슈필만은 이곳에 머무르기로 합니다. 그러나 식량이 다 떨어지고 평소 슈필만을 의심하던 옆집에게 유대인인 것이 들통나 결국 그곳을 도망쳐 나옵니다.
 그렇게 도망치던 슈필만은 불현듯 마렉이 전해주었던 쪽지를 생각해내고, 쪽지에 적힌 주소로 찾아간 곳에서 옛 연인 도로타를 만납니다. 마렉은 지케에비치라는 사람의 주소를 주었는데, 도로타는 그의 아내였습니다. 자카에비치는 슈필만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는데 건물 전방에는 독일 야전병원이, 옆에는 독일 경찰국 등이 있었습니다. 이는 등잔 밑이 어두울 것이라는 지키에비치의 생각이었습니다. 얼마 후 지키에비치는 앞으로 슈필만을 돌봐 줄 사람인 안텍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연합국과 러시아가 함께 독일을 공격하고 있다는 기쁜 소식도 전합니다. 슈필만은 안텍이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불만이었는데, 안텍은 식량을 살 돈이 없다는 핑계를 대자 자신의 시계를 내어줍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도로타와 지케이비차가 찾아와 발견한 모습은, 썩은 음식을 먹고 병에 걸린 슈필만이었습니다. 슈필만을 돌보던 안텍이 슈필만의 유명세를 이용해 전국에서 자금을 모아 도망쳤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방치되어 병에 걸렸고, 도로타와 지케이비치 부부가 슈필만을 도와주게 됩니다. 다행히 슈필만은 회복을 하게 되었고 1944년 8월 1일이 됩니다. 슈필만의 은신처 인근에서 바르샤바 봉기로 인해 독일군과 저항군의 싸움이 일어납니다. 길어진 싸움에 슈필만의 은신처까지 공격을 받게 되고, 폭격과 독일군을 피해 도망치는 신세가 됩니다. 은신처 건너에 있던 야전병원으로 도망쳐온 슈필만은 이곳에서 잠시 지내게 됩니다. 바르샤바 봉기가 진압된 후 독일군은 도시에 불을 지르고, 슈필만은 이를피해 폐허가 된 게토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는 빈집에서 먹을 것을 구하던 중 피클 통조림을 발견하고, 이를 먹기 위해 통조림을 열던 중 독일군 장교 호젠펠트를 만나게 됩니다. 호젠펠트는 슈펠만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하던 중 그가 피아니스트였다는 것을 듣고 그를 어디론가 불러냅니다. 두려움에 떨며 슈펠만이 간 곳에는 피아노가 놓여있었고, 호젠펠트는 슈펠만에게 피아노를 칠것을 요구합니다. 죽음의 두려움과 인간의 본성만 남아있던 슈펠만은 피아노 앞에 앉아 곧 연주를 시작합니다. 연주가 끝난 뒤 호젠펠트는 슈펠만을 두고 떠났고, 그날 이후 호젠펠트는 슈펠만에게 지속적으로 먹을 것을 가져다 줍니다.
 시간이 흐른 뒤 독일군은 러시아군에게 패배하며 바르샤바에서 철수를 하게 됩니다. 철수 전 호젠펠트는 마지막 식량을 건네며 현재의 상황을 이야기 해주고 슈펠만의 이름을 물은 후 떠납니다. 폴란드군이 바르샤바를 탈환하고 슈필만은 그곳에서 구조됩니다.


2. 영화 <피아니스트> 정보

 영화 <피아니스트>는 독일, 영국, 폴란드, 프랑스의 합작 영화로 다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휩쓴 명작이며 제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전쟁 속에서 유린당하고 참혹하게 학살된 유대인의 모습들을 실화를 바탕으로 그려내 가슴이 아픈 영화입니다. 국내에서는 2003년도에 개봉하여 꽤 오래된 작품이고 2시간 30분이라는 긴 러닝 타임을 가지고 있지만 충분한 재미와 여운을 가질 수 있는 영화입니다.

 

3. <피아니스트>속 아름다운 연주곡들

 쇼팽 녹턴 20번 C# 단조의 선율로 영화는 시작됩니다. 녹턴은 밤의 적막함을 묘사하는 곡의 장르인데, 이 곡은 쇼팽이 20대에 쓴 곡이지만 사후에 출판되어 알려졌습니다. 곡은 단조인 제 1주제를 지나 장조인 제 2주제로 향합니다. 장조로 전환되는 그 순간 세계 2차대전의 신호탄이 된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발발되며 큰 포격소리가 울립니다. 악보에 적혀있는 지시어는 ‘소토보체’ ,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연주하라는 뜻입니다. 이를 비웃기나 하듯 화마는 방송국을 덮칩니다. 폴란드에게 장조의 선율은 없었던 것일까? 라는 물음이 담겨 있습니다.
 시간이 훌쩍 지난 겨울 자고있던 슈필만의 귀에, 옆집에서 피아노를 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옆집에서 들리던 피아노 연주는 폴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연예인 ‘유지니우스 보도’가 부른 ‘그녀와 9시에 약속을 잡았다네’ 입니다. 그가 게토의 식당에서 피아니스트로 일할 당시 쳤던 곡이기도 합니다. 음악을 듣다가, 음식을 먹기위해 접시를 찾다 깨뜨려 버린 슈필만은 옆집 사람에 의해 또다시 도망치게 됩니다.
 도로타의 집으로 도망쳐 소파에서 잠을 자다, 첼로소리에 잠을 깬 슈필만의 장면에서 첼리스트인 그녀가 연주하던 곡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연습곡 1번 G장조 입니다. 바흐 시대의 첼로는 주로 저음을 맡는 반주용 악기였는데 바흐는 그러한 통념을 깨고 첼로를 위한 독주곡을 만들었습니다. 보통 독주곡에는 피아노 반주가 깔리기 마련인데, 이 곡은 반주없이 오직 첼로만이 나옵니다. 언젠가 피아노와 첼로 협주를 하자던 슈필만은 쓸쓸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봅니다.
 도로타 부부가 마련해준 도피처에 마련된 피아노를 치는 슈필만이 처음 친 곡은 화려한 대 폴로네이즈 Eb장조 입니다. 영화에 쓰인 쇼팽의 곡 중 유일한 장조 조성의 곡입니다. 폴로네이즈란 폴란드의 민속 춤곡을 가리킵니다.
폐허가 되어버린 옛 거처 케토로 돌아온 슈필만이 어디선가 들리는 피아노소리를 듣습니다. 곡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C#단조 1익장입니다. 월광 소나타로 잘 알려진 곡입니다. 밤을 주제로 삼은 두 곡, 쇼팽의 녹턴 C#단조와 베토벤의 월광 C#단조의 대조를 통해 감독은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독일장교가 슈필만을 데려간 곳에 있었던 피아노로 슈필만이 친 연주곡은 쇼팽 발라드 1번 G단조 입니다. 두 사람은 국경을 뛰어넘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음악 앞에 섭니다. 발라드 1번은 쇼팽이 폴란드의 민족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콘라트 발렌로트’에 영향을 받아 작곡한 곡입니다. ‘콘라트 발렌로트’는 리투아니아의 소년 발렌로트가 독일 기사단에 복수하는 내용이 담긴 서사시 인데, 폴란드의 민족정신과 비극성을 잘 표현해주는 작품입니다.

 실제로 쇼팽 시대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의해 갈갈이 찢겼고 쇼팽이 스무살이 되던 해 1830년에 폴란드에서는 러시아에 대항하는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곡 쇼팽은 ‘하느님, 당신은 러시아인입니까?’ 하고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쇼팽은 발라드 작곡에 착수하여 5년 후에 완성합니다. 슈필만 시대에는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이 폴란드를 갈라먹었으니 쇼팽과 슈필만은 어쩌면 시대를 뛰어넘는 끈으로 이어져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슈필만은 자서전에서 이 상황을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방에 들어가자 벽 가에 피아노 한대가 놓여있었다. 건반에 손가락을 대는 순간 손가락들이 경련을 일으켰다. 나는 2년 반 동안이나 연주를 하지 못했다. 내 손가락들은 뻣뻣하고 켜켜이 쌓인 때로 뒤덮여 있었으며 손톱도 깎지 못했다. 제대로 조율도 되지 않은 피아노 줄들의 탁한 울림이 우울한 멜로디가 되어 돌아왔다.’ . 실제로 슈필만은 녹턴 20번을 쳤다고 말합니다.
 1주제를 지나 경과구로 도입하는 음악, 경과구가 지나면 장조인 2주제가 등장하는데 영화의 발라드 1번은 장조 주제를 생략하고 바로 코다로 넘어갑니다. 폴란스키 감독은 의도적으로 녹턴 20번과 발라드 1번의 장조 주제를 생략했는데 쇼팽이 적은 2주제의 지시어 ‘소토보체’의 장조 멜로디를 생략하고 격정적인 코다로 넘어가는 것은 단조의 배경이 짙게 깔린 영화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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